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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지 않을 이야기 - 세번째

므길 2012. 12. 30. 02:29

 겨울에 낮게 떠서 기척만 보이고 이내 사라지는 해를 낮 내내 볼 수 있는 회사 내 자리. 코드에 남아 있는, 흔적만 남아 있는 이전 사람의 손길을 본다. 2008년 5월 13일, 2006년 11월 3일, 2011년6월 15일 - 뚱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떠난 사람들의 기록과 과거 그 날의 내가 연대표처럼 그려진다. 그리고, 올해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들도.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꼬이는 관계가 있다

수습하려고 건넨 말이 상처에 뿌리는 소금이 될 때가 있다

서로의 시간이 남들보다 몇 배나 빠르게 소진되는 사이가 있다

 출근길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 2호선. 열려있는 문 너머로 바라보는 서울 지도에는 우리가 스쳐지나고 만났던 곳을 볼 수 있다. 종로와 을지로 1가 사이, 구로와 안양천 사이, 코엑스와 대치사거리 사이, 삼청동과 부암동, 신대방, 동대문, 야탑, 난지, 올림픽공원, 명동, 신당, 목동......마주치거나 스치는 건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도 있지만 세상 전체에서 그 종이 한 장을 뺀 만큼이기도. 만나지 못하게 되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드네.

 너는, 누군가와 가까워지기 위해, 그 사람의 생활 - 한 마디 한 마디, 듣는 음악이며 먹는 음식, 주말에 가곤 하는 장소들, 가족, 회사 고민거리나 트라우마 같은 것들을 들여다 본 적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누군가의 퍼즐이 어떻게 맞춰지는가를 남들보다 더 많이 안다는 것이 결코, 그 사람과 내가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보장하진 않는다. 정말 가까워지고 싶다면 몰라야만 하는 부분도 있고, 덮어두고 넘어가야만 하는 아픈 자리도 있는거다. 이번에도, 많고 많은 사고를 치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알게모르게 짜증이 났겠구나, 나 때문에.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거다. 걔가 날 안았던 일도, 내가 그 애를 안았던 일도.

 눈에 띄게 희미해졌다. 더 이상 뭔가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11월 중순부터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나서 한 달 보름만에 이렇게 될 수도 있는건가. 예전엔 반 년은 걸려서야 좋아하는 사람이 일상에서 멀어졌었는데. 내가 변한 건지, 그만큼 질렸던 건지. 섣불리 인연이 아니었다, 성격이 맞지 않았다 등등의 평가를 내리고 꼬리표를 달아놓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으니, 그대로 지켜보기로 한다. 어쩌면 방관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번지르르한 변명일지 모르지만.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 초반 이후 거의 10여년 만에,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의 일부를 만났다. 자기를 깎아내리면서 타인에게 감정을 구걸하는 모습 - 놓치기 싫은 사람을 만났는데 잡을 방법이 없을 때 떼를 쓰는.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마,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겠지. 정신줄을 조금만 놓으면 다시 나타나서,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듯한 상황에 모든 걸 더 정떨어지게 해 놓을지도.

 예전의 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같이 무언가를 하다보면,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의 내가 싫어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절반 정도는 있었다. 그런데 올해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나서 드는 생각은, 결국 어느 정도 이상은 바뀌지 않는 게 아닐까, 가장 내면에, 중심에 있는 무언가는 대체불가능한 게 아닐까... 그런 가정에 이어지는, 상상속의, 가능성 높은 결론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 - 내가 막연하게 끌린다고 느끼는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나를 깎아내고 덧붙이는 게, 쉽고, 가능한 일이라 확신하지 않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