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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지 않을 이야기 - 다섯번째

므길 2014. 12. 31. 03:26

  꽤 오랫동안 - 반 년이 넘게 - 이 페이지를 열어두고 글자를 적지 못한 채 바라보기만 했다. 단지 어떻게 표현할지 문단을 어떻게 이어나가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떤, 결여. 하고 싶고 해야 할 말이 따로 있는데 정작 당사자가 해답을 찾지 못하고 다른 이야기만 주절주절 늘어놓는다는 느낌. 분명한 것은 , 내가 처음 발을 담근 강물이 홍수가 되어 거기에 휩쓸려가는 중이라는 것. 언제까지일지 모르겠지만 육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차분하고 가라앉은 마음으로 무언가를 읽고 쓰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래서, 잠시 눈을 닦고 숨 돌릴 여유가 있을 때, 적는다. 2014년... 겨울잠을 잘 때와, 일을 시작했을 때와, 말라깽이씨를 만나고 나서가 확연히 다르다. 이게 온전한 한 해인가 빠르게 보낸 삼 년인가 알 수 없다 느낄 때가 많다. 

  사막 같았다. 바람이 불어 매번 모양이 변하지만 결국 그 모습이 그 모습인. 영화도 별로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고 사람은 되도록 만나지 않았다. 올해가 되기 전엔 그저 홀가분했다. 누구에게도 지시받지 않고 어떤 일정도 없는 삶. 자고 싶으면 잤고 먹고 싶으면 먹었다. 워낙 유지비가 저렴한 인간이라 백수 상태로 몇 년은 버틸 수 있을 만큼의 돈도 있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외로울 땐 2012년 9월을 생각했고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라며 적당히 자조했다. 다른 별로 여행을 떠나기 전 잠시 쉬고 있는 어린왕자 같다는 말을 들었다. 궁금했다.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이 적막을 깨트릴 수 있을까. 구원이 필요했다. 극복해야 했다.

  심심해서 만나던 이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당사자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겠지. 밤 열한 시까지 술을 마시고 돌아다녀도 그 이상이 없는 일이 여러 번 반복되는 남녀 사이에 더 이상 기대할 건 없다는 걸. 언젠가 내가 자기 세계에서 기척도 없이 사라질 예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거다. 가볍고 소소한 관계는 언제나 작은 삶의 낙이다. 적당히 술을 마시고 심각하지 않은 이야기를 할 사람이 있다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니까. 하지만 초콜렛만 먹고 살 수는 없는 거다 사람이라면. 과자로 허기를 달랠 수는 있어도 여행을 떠날 수는 없는 거다.

  작년 겨울에는 <맨 오브 라만차>를 봤었다. 사서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 왼쪽에선 남자가 코를 파고 있고 오른쪽에선 여자들이 잡담을 하고 뒷자리에선 간헐적으로 의자를 발로 차고 앞자리에선 떠드는 노부부의 머리 때문에 시야가 가리고. 그 난장판 사이에서 극에 집중해야 했다. 첩첩산중에 앉아 있었지만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죽음을 앞둔 세르반테스가 마지막으로 자기 주변의 죄수들을 돈키호테의 세계로 초대하듯. 돈키호테가 둘세네아를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