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9일
관이, 생각보다 훨씬 더 가벼웠다. 여섯 명이 들어서 그랬을까 화장용이어서 그랬을까. 언젠가 관을 들 일이 있겠다 싶었지만 사촌동생의 장례 때일 줄은.
화장을 하기 전 동생의 엄마와 아빠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
납골당에 유골함을 안치하기 전에 시스터가 자기 결혼식 주례를 해 주신 신부님을 불렀다.
짧은 기도. 가족들의 마지막 말.
7월 28일
화요일 패치 준비가 잘되지 않아 저녁에 다시 회사에 가야 했다. 장례식장에는 입구에 걸려있던 동생의 졸업사진만 오래도록 바라봤다. 이모를 닮은 쌍꺼풀. 이모와 엄마와 나의 턱선.
어렸을 때에는 말이 많고 활발한 아이였다. 중학교 때 보고 나서 내가 서울에 오기 전까지 거의 10년, 15년 간은 왕래가 없었다. 이사와서 처음 이모 집을 방문했을 때 약간 피로하고 우울한 동생의 눈빛을 가직 기억한다.
이모부에게 등떠밀려서 영국으로 대학을 가고 나서는 혼자서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학교도 가지 않아서 이모가 급히 가 보니 집 밖에 나가지도 않고 샌드위치만 먹고 있었다던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는데 거의 10년을 외국생활.
졸업 후 돌아와서는 인천에서 회사를 다녔다. 자취하면서 연애를 시작했는데, 이모 차를 가지고 나가는 일이 많아져서 신경쓰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여자친구는 부고를 들었을까. 잘 모르겠다.
7월 27일
적당히 자고 일어나서 언제 운동을 갈까 고민하고 있었다. 매형에게 전화가 온다. 별 생각없이 받지 않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매형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병원으로 가면서 지난주에 엄마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동생이 열이 나는데 감기도 아니고 도무지 원인을 모르겠다고, 큰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해 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정밀검사를 해 봐야겠지만 최악의 상황도 생각하고 있으라는 말이 추가되었다.
최악의 상황이 한 주만에 죽는다는 뜻은 아니었을 텐데.
병원 로비에서 시스터를 만났다. 지금은 흐릿해진 많은 말 - 혈구탐식, 혈소판 깨짐, 갑작스런 호흡곤란, 자기 의지로 움직이지 못하는 폐.
병상에 누워있던 동생의 얼굴을 봤다. 탈진한 듯한 표정이었는데 움직이질 않았다 몸 어디도. 창백한 발. 바닥에 여기저기 널부러진 응급실의 흔적. 이모부는 자기가 못난 아비여서 아들이 죽어버렸다고 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를 외국에 버려놨다고, 동생이 이모에게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 오랜 시간 지구 반대편에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까. 쓸쓸한 시간은 어떻게 버텼을까.
회사에서 가장 든든한 사람이었던 상사도 떠나고 말라깽이씨도 떠났을 때 올해는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해구나 라고 느끼긴 했었다. 이런 이별은 아니었다. 이제 고작 서른인데,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나이였는데.